2014년 9월 16일 화요일

자작나무의 함경도 이름 '보티'와 영어의 birch

 자작나무의 함경도 이름 '보티'와 영어의 birch  

단군신화도 사실은 '웅녀신화'라는 말이 더 근원적인 표현이다. 원시 모계사회에서는 남성은 가족의 일원보다는 일회적 또는 임의적 기간만이 가족이라는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중국의 모계사회를 유지하는 족속들의 풍습에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웅녀가 신단수에 기원했다는 것은 배필을 만나기 위하여서라기 보다 자식을 낳기 위한 어미의 기원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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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자작나무 동네 풍경

자연 속의 동물적 차원이나 고대 원시인류의 '가족'의 의미는 모자 또는 모녀의 모계 계승 구조를 가졌다. 따라서 후대의 제도화된 종교적 영향이 없었던 오래된 토속 신화들의 구조는 모계 전통의 구조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런 면이 단군신화의 웅녀 중심의 스토리 말고도 신라 시대의 풍류도와 그 사회 정치적 구조에 존재하고 있었다.  

같은 면에서 알영이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적 표현은 보다 원천적인 원시 모계사회의 여신 신화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나중에 '신라시조'로서 박혁거세가 더 강조된 것은 남성중심주의 시대의 영향이었다. 

<화랑세기>에서 보여주는대로 나중에 신라 왕계에서 여성적 계승이 약화되었을 때 남성중심의 의미를 강화했던 분위기에 이어지면서 그후 고려 중기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에서 남성시조가 강조되었을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영이 태어났던 계룡 그리고 그 입술이 새 부리를 하고 태어났을 정도로 어미 계룡에게서 계룡의 딸로 태어난 알영은 과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익룡과 같은 모습의 괴수에게서 태어났을 것인가?

계룡을 요즈음의 무슨 SF(싸이파이) 영화 속의 익룡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신라 신화에 나오는 계룡은 식물신화 개념에 연결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고대 모계 신화들은 남성적인 동물신화보다 여성적 식물신화에 더 많이 더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신화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강조되었다면, 식물신화는 원시모계사회의 신화적 의식이며 여성중심의 기원문화에 연결된다. 따라서 신라 시조신화의 알영에 대한 계룡 신화는 단풍나무와 자작나무가 가졌던 봉황 또는 계룡 개념의 '여신적 신목'이 계룡 이미지에 연결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흔히 용봉사상에서 용은 남성적이고 봉은 여성적이라는 말은 그 표현 자체는 옳으나 봉황 신화가 훨씬 더 근원적이고 오래된 모계사회 중심의 원시형태의 신화적 잔재였다. 봉황은 날아다니는 새의 개념 이상 높은 산봉우리 및 그와 닮은 단풍나무와 높은 산에 자라는 자작나무 신목에 연결하여 읽어야 한다. 

그렇기에 용은 '앉는 자리'가 없지만, 봉황은 오동나무에 앉고 대나무 죽실을 먹는다는 식물신화와 함께 표현된다. 특히 단풍나무와 자작나무는 봉황신화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민족 역사 속에 식물신화의 깊은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필자는 단풍나무가 봉황에 연결된 신목이라는 것을 앞선 장에서 상세하게 밝혔다. 단풍나무와 자작나무는 계룡과 같은 의미일 것이고 특히 신라인들에게는 자작나무의 모양이 계룡의 의미와 연결된 신목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초기 금관 형상에 적용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 필자가 주장하려는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신라 신화에서 말하는 계룡의 개념은 본래 신목(神木)에 연결된 신화적인 나무의 의미를 바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자작나무나 단풍나무가 계룡이나 봉황 이미지에 어떻게 표현되어 나타나고 있을까?

남성지배 시대에 와서 용 신화도 나무와 연결하여 강조되었다. 그래서 소나무가 '용트림 한다'고 하는 것에서도 계룡과 연결된 신목사상을 볼 수 있다. 계룡(鷄龍)의 '鷄' 즉 봉이 강조될 때 그 나무는 '봉트림'이 아닌 거대한 나무가 그 가지를 늘어트리는 모습은 '봉황의 홰치는 날개짓'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신라 시조신화를 언급할 때 알영을 단순히 박혁거세 '부인'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알영은 모계사회의 '여신' 개념에서 출발한 더욱 근원적인 원시형태의 신화적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신라 금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금관은 出자형보다 더 오래된 자작나무와 자작나무의 그 잎을 달고 있는 형태이다.(사진참조)


*가장 오래된 신라 금관 (경주 교동 폐고분 출토)
자작나무와 그 잎을 닮아 있다.

Betula papyrifera (Canoe Birch, Paper Birch)
*자작나무 잎

단군신화에서 신단수는 자식을 잇는 중요한 기원의 대상이다. 왕관의 의미는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왕조의 조상과 후손이 태어남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상징이다. 따라서 왕관에 신목을 상징화시키는 것은 그 기원적 의미에서 당연하고도 타당한 뜻을 가진다.

경주 교동 폐고분에서 출토되었던 위의 신라 금관은 자작나무 가지 모양을 상징하고 있으며 특히 그 잎은 자작나무 잎을 닮아 있다. 이에 대하여서는 앞선 글에서 논한 자작나무 형상의 신라 금관과 단풍나무 형상의 백제 금관에 관한 내용에서 다루었다.

<신라의 자작나무 금관과 백제의 단풍나무 금관 (3)>


바이칼호 주변에는 자작나무를 상징한다는 제사장의 유물이 지금도 나온다고 한다. 자작나무 금관은 분명 제정일치의 원시 국가의 아주 오래된 신화적 신목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신단수(神檀樹)의 단(檀)은 박달나무 '단' 즉 자작나무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대로 신라의 가장 오래된 금관의 모양이 '자작나무 금관'이란데서 필자는 이것을 단순히 금관이라고 하지 않고 '단관(檀冠)'이라 칭해둔다. 자작나무의 껍질은 마치 갑옷을 입은 모양과 유사하고 단풍이 든 그 잎 모양은 금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작나무와 그 잎 모양
(위의 신라 금관 이미지에 클로즈업된다)

단관은 그 모양에서나 의미에서 여성 지배자가 쓰기에 알맞은 이미지를 하고 있다. '숲의 여신'으로 받아들였던 자작나무 자체가 여신의 신목인만큼 '신들린 나무' 그 자체이기 때문에 북미인디안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여신이 거하는 자작나무 자체로 받아들였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박달나무 신단수에 관한 단군신화를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시각으로 재기록하지 않은 원판의 신단수 신화는 적어도 웅녀가 신단수 여신이을 수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올림푸스 신의 화신이 올림픽 금메달을 딴 사람의 월계관이다. 금메달은 월계관의 금관 의미라 할 수 있다. 월계수 가지를 머리에 쓰는 것은 신라 식물왕관의 계보에 그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이스의 월계관은 신라 여성 지배자들 자작나무 관을 씀으로써 자작나무(박달나무) 신으로 화한다는 의미에 연계된다. 그런 의미가 자작나무 금관 즉 단관을 쓰는 여왕의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웅녀 = 신단수(박달나무)

                              신라여왕 = 자작나무(박달나무)


'朴'자가 자작나무 껍질 일어난 모습이며, 껍질을 벗기고 또 수액이 나오는 자작나무를 '박달나무'라고 표현한 것은 앞선 글에서 논했다. 박혁거세의 단목(檀木)의 의미로 '박단나무 - 박달나무'로 표현했을 것이라는 것은 특정 인물인 박혁거세 이상 식물신화에 연결되어 있는 '朴'자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 신라의 왕위 계승은 모계 계승으로 이어져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왕계 계승은 남성인 부계 계보 여성인 모계 계보인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의 두 계툥이 지그재그 순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원시 모계신화 계승의 전통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군사적 지배의 남성적인 힘 이상 종교적인 여신적 신국(神國)사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나라가 신라였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에 여왕이 세 명이나 나온 것도 이러한 배경이다. 그런 면에서 신라인들에게 식물신화 즉 신목에 대한 신화적 의식은 특히 강조되었을 수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무속의 굿에서 대나무나 소나무가 대잡이와 함께 흔들리는 것은 나무에 신이 내린다는 것을 전통 풍습으로 믿어 왔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에서 '신라에는 신국(神國)의 도(道)가 있다'고 기록한 그 신국은 바로 여신에 대한 풍류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화랑이 본래는 여성이었다는 것은 이것을 뒷받침한다.

박혁거세 어머니를 의미하는 선도성모가 경주의 선도산과 지리산 노고단에 제단으로 조선시대까지 모셔졌다는 것은 여신이 단순한 인간숭배의 차원이 아닌 산신 신앙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특히 높은 고산 상봉우리를 선호한 것은 자작나무 신목에 대한 계룡(鳳) 숭배가 그 속에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조선의 불교와 유교의 국가적 영향으로 천년 신라문화의 잔재는 많이 사라졌을 지라도 고로쇠 단풍나무와 거제수 자작나무의 수액을 먹으러 순례를 떠나는 곡우물 제전과 전통 느티나무에 대한 조상들의 숭배의식은 지금 까지도 남아 있는 풍습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전통 고분들의 모양이 봉분(conical mound)으로 된 배경은 자작나무 잎의 모양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신라 금관에서 보이는 자작나무 이파리들은 계룡 즉 봉황의 깃털(공작 깃털을 보라)을 상형화한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분(封墳)이라고 할 때 '봉'이란 자작나무 잎인 봉황의 '鳳墳' 의미도 그 음운 속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신화적 의식으로 보면 죽어 신선이 된다는 것은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자작나무와 같은 여신 앞으로 다시 돌아가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자작나무 껍질로 집(티피)을 짓고 죽어서는 시신의 뼈를 자작나무 껍질로 싸서 봉분을 했다는 것은 다시 자작나무 여신 앞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도가 그려진 것에는 천마를 자작나무에 싸서 보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천마도의 천마는 천마총의 주인공이 타던 말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박혁거세 신화에서 등장하는 천마에 대한 숭배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것은 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성모 또는 알영부인의 신화적 배경에서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고대 우리 민족은 자작나무 껍질로 집을 짓고 자작나무 껍질에 싸여 시신이 장례되었던 전통은 함경도 지방의 전통 풍습에 남아 있다 그 지역의 풍습에는 사람이 죽으면 장사 지낸지 3년 후에 다시 개묘하여 백골이 된 시신을 자작나무 껍질로 싸서 다시 묻는 '개천'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자작나무 껍질은 사람의 피부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자작나무 안쪽의 붉은 살은 사람의 살로 보았을 것이고 그 안쪽의 나무 중심은 뼈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작나무가 상징하는 것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물 즉 그 수액이다. 앞선 장에서 다루었듯이 지금도 곡우물 축제에 남아 있는 자작나무과인 거제수나무의 수액을 채취하는 것은 바로 그 수액이 물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북미 인디안들이나 아이누족들도 산속에서 물이 없을 때는 자작나무 밑에서 불을 피우고 그 자작나무 껍질에 상처를 내어 수액을 받아 취사에 썼다는 것은 자작나무의 의미가 생명수나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바이블의 생명나무라는 것의 의미는 수렵시대에 산 속에서 때로 구하기 힘든 수분을 채워주는 자작나무의 수액에 대한 의미로 그렇게 '생명나무'로 표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창세기에 나오는 생명나무는 자작나무였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전통 지붕집 가운데 너와 지붕은 나무껍질로 지붕을 만든 나무껍질 기와집을 말한다. 요즈음 많이 보이는 나무껍질이 아닌 나무 널판으로 된 '너와'라는 것들은 도끼문화의 발달을 말하기 전에 톱으로 끊은 자국들이 나란히 있는 것들이라 아주 옛날 너와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톱이 개발되기 이전의 사람들에게 너와는 분명 나무껍질로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떤 나무껍질이 가장 선호되었을까? 박달나무, 사스레나무, 거제수 나무 등의 자작나무과의 나무껍질들이다.

그런 나무껍질로 만든 지붕은 분명 요즈음 너와처럼 동강동강 난 것이 아닌 다른 형태의 나무껍질일 수 밖에 없다. 그 가장 좋은 유물이 북미 인디안들의 원뿔형 티피(tipi, tippee) 또는 돔형태의 위그웸(wigwam)이다. 전통적으로 인디안들은 자작나무 껍질로 두른 이동식 티피를 만들었다. 그렇게 보면 코리안들의 고대 '너와집'은 바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티피형태이었을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요즈음 신석기 - 구석기 시대 움집 유적을 재현한다면서 지푸라기 또는 그와 유사한 띠집으로 만드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농경시대 움집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수렵시대 사람들에게는 가을철이 아니면 제대로 자란 것을 획득할 수도 없는 띠풀이다. 수렵은 이동생활이기 때문에 띠집은 뜯어 옮기기에도 무겁고 부피가 크다.

그런 반면에 자작나무 껍질은 아무 때나 만들 수도 있는 재료이고 한결 가벼운 껍질 재료이다. 분명 농경시대 이전의 움집은 인디안들의 티피처럼 나무껍질로 만든 것이어야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 나무껍질은 기능성 이상 신화적으로 '숲의 여신' 자작나무의 가호를 받는다는 의미에서 자작나무 껍질로 티피를 둘렀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옛 건축 풍습 가운데는 귀신을 쫓기 위하여 집의 기둥 하나는 자작나무로 만들었던 전통이 있었다는 것은 수렵시대의 자작나무 티피 전통이 남아 있는 잔흔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너와지붕 또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었던 티피 지붕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너와 지붕용의 나무껍질이라고 하면 흔히 소나무 껍질을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 모양새가 지붕을 만들기에는 적격이 아니며 특히 소나무 껍질은 수분 흡수가 잘 되어 금방 썩을 수 있다. 그런 반면에 자작나무는 그 통나무 전체의 껍질을 벗길 수도 있어 요즈음의 합판과 같은 큰 두루마리 형태의 껍질을 지붕으로 두를 수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자작나무라고 하면 흔히 북쪽지방에만 있는 것으로 알지만, 남쪽 지방에서 많이 서식하는 자작나무과의 박달나무, 사스레나무, 거제수나무 등에서도 껍질을 벗길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고대 수렵시대의 지붕은 자작나무류의 껍질로 티피 형태의 움집을 지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할 것이다. 

신라고분 가운데 김영총과 양산 부부총에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모자가 나온 적이 있다. 1977년도에 신라 고분에서 글씨가 씌어진 자작나무 껍질이 발굴되었다든지 신라시대 석탑 안에서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이나 불경이 씌어진 것이 발견된 것은 불교시대 이전의 자작나무 신목의 신화적 전통과 그 기능성이 함께 남아 있는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작나무 신목이 계룡(鳳)에 연결되는 것은 그 불에 연결된 의미에서 더욱 그 연계성이 강화된다. 북미의 오지브웨(Ojibwe) 인디안들이 그들의 자작나무 신화에서 자작나무가 '불에 탄 흰 색'으로 보는 것처럼 자작나무가 불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불의 새인 봉황에 연결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작나무 껍질을 한 겹 벗기면 그 안쪽은 불이 타는듯한 붉은 빛이다. 

본래 '횃불'이라는 말은 계룡 즉 '봉황의 불'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이미 앞선장에서 논했지만, 風자는 鳳의 옛글자이기도 했다. 그 風 안에 들어가 있는 虫은 '충'이라고 읽으면 벌레이지만, 큰 동물을 칭할 때의 뜻으로 '훼'라고도 읽는다. 대훼(大虫)는 늙은 호랑이(老虎)를 의미하며 장훼(長虫)란 큰 뱀을 의미한다.

이러한 '훼'의 뜻을 보면 風은 봉황의 날개 아래 한 마리의 큰 뱀이나 짐승을 잡아서 날으는 모양처럼 보이는 글자가 된다. 또는 큰 뱀이 날개를 단 모습 즉 계룡 자체를 의미하게 된다.

닭이 '홰를 친다'고 할 때 그 '홰'는 '훼'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 횃대를 잡는 것은 큰 뱀을 잡고 있는 봉황(계룡, 금시조 등)의 모습에서 유래하여 뱀 대신에 막대기가 '횃대'가 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와 함께 '훼'는 홰치는 커다란 날개 자체를 의미하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호롱불에서 그을음인 '홰'가 올라온다는 것에서 불과 관련되는 불새인 봉황의 날개의 모습이 '홰'에 숨어 있다.  그래서 횃불이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불의 새인 봉황의 불 즉 '훼(虫)'를 든다는 의미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자작나무가 불의 새 봉황(계룡)의 신목이라면 횃불은 특히 자작나무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자작나무를 한자로 자작나무를 화(樺 자작나무 화)라고 하는 데서 그 배경이 남아 있다.

 * 자작나무 본재 


화(樺)란 나무가 불을 붙인듯 화려한 빛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화촉(華燭)을 밝힌다는 의미는 본래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횃불인 '樺의 불' 즉 횃불을 밝힌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자작나무 껍질을 불에 붙여 들고 기다리는 것은 북유럽에서 옛날 귀한 손님을 기다릴 때의 풍습이었다. 경기도 고양군의 전설로 남아진 백제 처녀 '한주(漢珠) 이야기'에서 고구려 왕자를 기다릴 때 횃불을 들고 기다렸다고 했던 것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횃불이었지 않았을까. 북미 인디안들의 자작나무 껍질 횃불 만드는 방법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북미인디안들의 자작나무 횃불(樺불) 만들기(아래 사이트 참조)


양초가 흔한 시대에 들어와서는 횃불 대신에 촛불이 많아져 자작나무 화(樺)에서 나무는 없어지고 화촉(華燭)을 밝힌다고 한 것이다. 원시형태의 화촉을 밝힌다는 것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횃불을 키고 신랑 신부가 각각 혼인 식장으로 걸어 나오도록 기다리는 의식이 혼인의 옛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서양인들이 자작나무 껍질 안에 촛물을 넣어 양초 장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작나무 횃불의 전통과 양초문화를 접목한 '화촉(樺燭)'이라 할 수 있다.


*자작나무 껍질로 두른 촛불인 '화촉(樺燭)'


자작나무를 켈틱족들은 birch라고 불렀으며 오늘날 자작나무의 영어 birch가 되었다. 앞장에서 밝힌대로 서양에서는 영어의 '버치(birch)의 어원이 동양의 산스크리트어의 "껍질에 글을 쓰는 나무"라는 뜻에서 온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런데 '버치'라는 말은 놀랍게도 우리말의 토속어에서 볼 수 있다.

함경도 지방에서는 자작나무를 '보티나무'라고 한다. '보티'와 '버치(birch)'는 음운상에 연결된 말이다. 특히 함경도 풍습에서 자작나무 즉 보티나무는 죽어 그 뼈를 싸서 장례를 치렀던 만큼 대단히 의미있었던 나무였다. 함경도의 '보티'가 켈틱족의 '버치'에 언어 역사적 연계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 언어 문명은 동과 서로 서로 연결된 흔적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Photo: William Moore peeling white birch bark from a felled tree, to be used for baskets, 1958
*William Moore peeling white birch bark from a felled tree, to be used for baskets.

산스크리트 문명은 동과 서로 연결되었다고 할 때 서양학자들이 birch에 대한 어원을 많이 알려진 산스크리트 문화에만 적용하고 고대 동아시아의 강력한 수렵민족이었던 고조선 고구려인들의 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함경도 지방에 남아 있는 자작나무의 뜻인 '보티'가 유럽을 거쳐 켈틱족 문화에서 'birch'로 이어졌을 개연성은 충분한 것이다.

특히 그 수액 채취의 풍습에서도 유사하며, 단군신화의 신단수가 '보티'이며 앞선 글에서 밝힌대로 켈틱족의 옴 문자의 첫 글자또 자작나무라는 것을 그것을 잘 뒷받침해주고 있다. 자작나무 껍질은 그 무엇보다도 생활 속의 티피, 카누, 바구니, 손나팔까지 다양한 도구를 만드는 기본 재료였다.  

*북미의 알곤퀸(Algonquin) 인디안들의 자작나무 티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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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칸신주 waswagoning 인디안 민속촉의 자작나무 껍질 위그웸 (2007년 필자촬영)

*자작나무 카누

*븍미 인디안들의 자작나무 껍질 그릇들





이처럼 수렵시대에는 '나무 껍질' 문화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동물의 껍질과 나무의 껍질은 모든 생활 용구를 사용하는 중요한 재료들이었다. '각을 뜬다'고 할 때는 동물이나 나무 등의 껍질을 벗긴다는 의미이다. 그 '각(殼)이 농경시대에 곡(穀)으로 바뀐 내용에 대해서는 앞선 글에서 논했다. 

여기에서 필자의 이미지 상상 대입을 좀더 강화해 보겠다. 

껍질이 한자로 각(殼)으로 표현되기 이전의 우리 말에서 자작나무를 뜻하는 '보티'가 어쩌면 '껍질'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보티'는 한자로 표현하면 '朴帶'라 할 수 있다. '티'는 '띠'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생각컨대 12지신상의 동물 '띠'들은 본래는 나무들로 된 12신목 '띠'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앞선 글 켈틱족의 '옴 신목들'에서 다루었다.

12지신의 '띠' 문화는 '허리띠' '머리띠' 등의 몸에 두르는 띠에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띠는 수렵시대에 호랑이 가죽 띠를 포함하는 동물 가죽들을 두르는 위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원시형태의 모계 시대의 경우 식물의 껍질 '띠'가 그 기원이었을 것으로 본다.

* 북미 인디안들의 자작나무 껍질로 땋은 반지
Three strand braided birch bark inset on a birch wood ring. 


여기에서 함경도 사람들의 '보티'가 영어의 'birch'(버치)와 연관하여 그에 파생되는 언어들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거나 가죽옷을 만드는 사람 또는 그 일을 '갖바치'라고 한다. '갖'은 '가죽'의 준말이다. 여기에서 '바치'는 그 자체가 자작나무 또는 그 껍질을 의미하는 '보티 - 바치'에서 '갖바치'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 박달나무, 거제수나무 등 자작나무과의 껍질들은 고대 수렵시대에서 마치 살가죽을 덮고 있는 가죽처럼 보였을 것이다.
'갖바치'의 '바치'는 '버치'(함경도의 '보티')에서 유래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갖바치'는 '짐승 가죽'과 '자작나무 가죽(껍질)'의 두 다른 껍질의 합치된 말로 볼 수 있다. '갖바치'가 짐승 가죽을 벗기는 백정과 관련된 하층계급을 다루는 말이었기 때문에 천한 사람을 뜻하는 의미로 '바치'가 나중에 '동냥바치' 등에서도 쓰였다. 그러나 본래 '바치'는 '보티' 즉 자작나무 껍질 또는 그 일을 다루는 사람의 의미로 쓰였을 수도 있다고 본다.

가죽을 다루는 이름에서 '갖바치'로서 가죽의 의미인 접두어 '갖'이 들어간 것을 볼 때 '바치'가 보다 오래된 말로 보인다.

본래는 '바치'가 '보티'로서 자작나무를 의미했었지만, 자작나무 껍질로 워낙 많은 생활용구(티피, 모자, 카누 등등)를 만들었기 때문에 '바치'는 자작나무 껍질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가죽을 다루는 사람에게 '갖바치'로 사용되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음운상에서 한 걸음 더 멀리 나가 보겠다. 우리말 '바지'는 윗도리와는 달리 나무를 닮은 두 다리의 '껍질'을 두르는 의복을 의미한다. 의복에서 의(衣)는 그 글자 모양새에서 상의를 말하고 복(服)은 月부에서 그 모양이 다리와 관련한 하의의 모양에 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나무 가지를 닮은 아랫도리를 음운상으로 '복'으로 표현한 것은 '보티'나 '朴(박)'과도 무관할 수 없게 보인다.

'보티 - 바치'는 '바지'에 연결된 배경이 있을 수 있다. 옛날 옛적 수렵시대 때는 의복이 없이 분명 자작나무 껍질 '바치'를 잘 다듬어 서양의 카우보이들의 허벅지나 무릅대처럼 대고 다녔을 것이다. 그것이 '바치' 즉 '바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자작나무 '버치'(birch)는 함경도의 '보티'에 연유했을 수도 있다.
'바지'의 어원은 보티겁질로 만든 바지 부품에서 유래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자작나무 껍질 '바치'로 나중에는 '가죽 바치' 즉 '갖바치'로 그 다음에는 천으로 된 아랫도리 옷을 그냥 '바지'로 불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버치' 즉 자작나무 가지 사이에서 '수액'이 나온다는 것을 '바지' 가랑이 사이에서 '물'이 나온다고 하면 너무 지나치게 멀리 나가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더 멀리 나가보면, 여성의 생식기를 의미하는 말의 어원과 여신의 신목으로 받들어 신라의 금관의 장식이 된 자작나무 즉 '보티'는 신화적인 같은 뿌리의 음운이었을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영어에서도 'birch'(버치) 음운과 유사한 '버진(virgin)'이 가지는 그 성모의 의미와 성적 의미가 서로 음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다.

자작나무의 옛 표현이었을 '보티'는 단군신화에서 뿐 아니라 신라의 여성 왕계 계승에서 자작나무 금관으로까지 남아 있는 것이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순례의 길을 떠나게 하는 곡우물 축제는 신라시대의 신화적 배경의 남은 풍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2/09/08 오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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